추사유배지(제주추사관) 서부지역 / 전시/박물관/민속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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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과 예술 세계를 꽃피운 추사의 마음이 서린 곳
추사유배지(제주추사관)
대정현은 추사 김정희가 유배를 와 9년 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조선시대 형벌에는 태·장·도·유형과 함께 사형이 있었는데, 유배에 해당하는 유형은 사형을 면한 형벌로 죄가 무거울수록 임금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냈다고 한다. 제주도로 유배를 오면 제주관아가 있던 제주목에 머무르는 것이 대부분이나, 추사는 제주목에서도 한참 떨어진 대정까지 유배를 왔으니 정쟁이 극심했던 당시의 상황을 짐작해볼 수 있겠다. 

경주 김씨 집안에서 태어나 북학의 대가이던 박제가를 스승으로 두었으며 문과에 급제한 후 규장각을 거쳤고 성균관 대사성, 형조참판을 지내며 소위 ‘잘 나가던’ 시절을 보냈으나 55세 되던 해 안동 김씨 세력과 벌이던 정쟁에서 밀려나 제주도로 유배오게 된다. 유배 중에서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위리안치’형을 받는데 이는 지금도 담장을 두르고 있는 가시달린 탱자나무를 통해 알 수 있다. 하지만, 지식인이 귀했던 제주이기에 당대 최고의 석학이자 청나라에까지 이름을 알리던 인물인 추사에게 학문을 배우려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추사가 머물렀던 원래 집은 제주 4·3항쟁 때 불타버려 후에 복원을 했는데 제주도 민가의 원형을 잘 보여준다. 

추사는 이곳에서 오랜 유배생활을 하면서 마음자세가 변하게 되는데 그와 관련한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제주도로 유배를 오면서 벗이었던 초의선사를 만나기 위해 해남 대흥사를 찾았다고 한다. 그때 대흥사에 걸려 있던 원교 이광사의 ‘대웅보전’ 글씨를 보고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떼버리라고 했다 한다. 하지만 유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이곳에 들러 예전에 자신이 잘못 보았다며 다시 걸어달라고 하고 자신의 글씨는 뒷방에 걸어달라 부탁을 하였으니 유배지에서의 생활이 겸손한 마음을 만들었으며, 그로 인하여 독특한 예술성을 가진 추사체와 글과 그림이 어우러진 그림인 세한도를 제주에서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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